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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사례

고물가와 경기불황을 이겨낸 아이아코카 회장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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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탱의 아버지, 크라이슬러의 구원자
사원에서 회장까지 올라간 자동차업계의 전설

 

대봉쇄기간 동안 무제한 양적완화로 인한 후폭풍으로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다. 거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사태로 인하여 CPI(미국소비자물가지수) 작년 6월 대비 9.1%나 상승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 연방준비위원회 이사회는 올해에만 금리 인상을 5회 시행하였다. 그 중 최근 3번은 한번에 0.75%씩 금리를 인상하는 자이언트 스텝을 단행하였다.

그 여파로 올해 1월 4일 4818.62포인트로 정점을 찍은 S&P500지수는 9월 29일 3610.40포인트까지 떨어지면서 무려 고점대비 25%가 하락한 상태이다.

자칫하다가 물가는 오르지만 경기까지 침체되는 스태그플레이션 올 수도 있다. 하지만 비슷한 위기를 이미 이겨낸 전례가 있다.

리 아이아코카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인물은 2차 오일쇼크에서 크라이슬러를 구해낸 “리 아이아코카”이다. 아이아코카는 일개 사원으로 시작하여 포드의 부회장 크라이슬러의 회장을 지낸 자동차업계의 전설이다.

1956년 제너럴 모터스에 밀려 판매실적이 저조한 포드에서 56 for 56 정책(56년형 자동차를 56$을 3년동안 할부로 판매 하는 제도)을 고안해냈다.

자동차 할부제는 당시 흔하지 않은 일이었고 그가 있었던 필라델피아 지부에서는 무려 7만 5천대의 차량이 추가로 판매되었다.

포드 머스탱 (사진출처: 픽사베이)

유럽형 스포츠카에 대치되는 바로 그 미국적인 자동차 머스탱을 기획하였다. 작고 날렵한 디자인과 강력한 엔진의 조합으로 청년층과 스포츠카를 타고 싶었던 사람들을 단숨에 매료시켰다.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과 4인이 탈 수 있기에 머스탱은 젊은 스포츠카 매니아 층과 4인 가족을 모두 탈 수 있었다. 출시 첫해에만 41만 대가 넘게 팔렸고 2년동안 머스탱으로 얻은 순이익은 1964년 기준으로 11억달러를 초과한다.

그러한 활약으로 포드 부회장까지 아이아코카는 끊임없는 고속 승진을 했다. 하지만 오일 쇼크로 인해 소형차에 힘쓸 것을 요구한 아이아코카는 대형차를 고집한 헨리 포드 2세와의 충돌과 그의 2인자 견제로 인해 1978년 포드에서 해고되고 만다.

여러 활약으로 포드 부회장까지 끊임없는 고속 승진을 한 아이아코카 (사진출처: 이미지투데이)

그의 능력이 더욱 빛난 것은 포드에서 해고된 뒤 크라이슬러의 회장으로 일할 때이다. 그의 자서전에 오죽하면 “앞날에 닥칠 상황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크라이슬러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고 회고했다.

1978년 11월 2일 취임한 날에 발표한 3/4 분기 손실액은 회사 창립 이후 최악인 1억 6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79년에 발생한 이란 혁명으로 인해 2차 오일 쇼크가 발생하였다. 폴 볼커 연준의장은 금리를 한 번에 4% 올리는 초고금리 정책을 썼다.

석유가격

대형차 위주의 선호를 보이던 미국 시장은 높은 기름 값 때문에 소형차를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미국의 자동차 시장 점유율은 소형차가 강점인 도요타를 위시로 한 일본차들의 약진이 계속되었다.

외부사항과는 별개로 크라이슬러 내부의 문제도 심각했다. 다양한 자동차회사를 합병한 구조로 인해 지휘체계가 분명하지 않았고 재무 담당자가 없어서 어디서 손실이 나는지도 알기 어려웠다. 게다가 품질보증비용이 연 3억 5천만 달러에 달했다.

파산 직전인 크라이슬러는 당장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 정부에 15억달러에 달하는 지원 대출을 요청하였다. 그중 12억 달러를 지원 받았는데 성공하였다. 자유경쟁을 지향하는 미국에서 정부의 대출 보증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그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대중들을 설득하기 위해 광고를 동원한 크라이슬러 (사진출처: 이미지투데이)

대중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광고를 동원했다. 이미 밑 빠진 독 취급당하는 크라이슬러의 이미지를 타파하기 위해 정면으로 부딪히는 메시지들을 담았다.

‘크라이슬러가 망하면 미국은 잘사는 나라가 될 것인가?’, '크라이슬러, 자기 몫은 안 하고 손만 벌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크라이슬러, 과연 풀지 못할 문제만 생산해내는가?' 아이아코카는 본인의 서명을 모든 광고에 넣어 자신이 이 기업의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의 경쟁시장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크라이슬러를 파산시키고 일본자동차가 그 시장을 잠식하는 것이 이로운가에 대해 주장하였다.

구조조정이 필수적이었던 이 과정 속에서 아이아코카는 자신의 연봉을 1달러로 책정하고 노조와 협상을 들어갔다 (사진출처: 이미지투데이)

한편으로는 크라이슬러의 파산으로 60만명의 실업자 발생과 2차 3차 벤더들의 붕괴 및 부품회사의 줄 도산으로 인해 발생할 문제를 통해 지역구 의원들에게 설득과 협박을 같이 하였다. 이를 통하여 간신히 대출보증에 대한 의원들의 동의를 얻어냈다.

구조조정이 필수적이었던 이 과정 속에서 아이아코카는 자신의 연봉을 1달러로 책정하고 노조와 협상을 들어간다.

균등희생의 원칙을 강조한 아이아코카는 33명의 최고위급 이사진을 해고하고 두차례에 걸친 대규모 해고조치로 15000명이 넘는 노동자를 내보내야 했다. 각종 사업부와 공장을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노동자들은 시간당 임금을 2달러씩 삭감하여 노동자들은 연간 1만 달러의 임금삭감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4000만달러 상당의 노동자 보유 주식 조항을 받아들이면서 노동자들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 힘썼다.

K-platform을 사용한 닷지 aries

구조조정과 별개로 새로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없는 재정 속에 신제품을 개발해야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헨리 포드 2세에게 내쳐진 인물들과 각 분야의 전문가를 데리고 오면서 새로운 기회를 찾던 크라이슬러는 연료 효율이 좋은 전륜구동 기술을 가진 k-모델을 내세우면서 일본 소형차에 대항할 수 있었다. 그가 포드에서부터 주창한 미국산 소형차는 불황이었던 상황에서 크라이슬러를 구원했다.

온갖 조롱을 받던 크라이슬러는 상환기간을 7년 앞둔 1983년에 부채 15억 달러를 완전히 상환하였다. 해고한 노동자들을 다시 복직 시켰으며 임금을 다시 인상함으로 노동자들의 희생을 잊지 않았다.

아이아코카의 위기 속 리더십 발휘는 공감과 설득을 통한 소통 속에 있다. 그 또한 해고의 아픔을 알고 있던 사람이다. 노조와의 소통을 위해서 스스로 연봉을 1달러로 책정하여 모두가 함께 회사를 위해 희생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러면서도 60만명의 직원들을 보호하기위해 정부와 시민들을 설득하는데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마지막으로 크라이슬러를 다시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으로 탈바꿈하면서 그들을 도와준 시민들의 기대를 헛되이 하지 않았다.

 

글/ 이세화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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