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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사례

컨셉 아티스트 류현지, 디즈니 일하는 방식? “서로에게 피드백 주고 아이디어 주는 문화 굉장히 잘 형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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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USC 영화학교 학사 졸업·2023년 6월 UCLA 영화미술 석사 졸업→디즈니 컨셉 아티스트
컨셉아티스트? 엔터테인먼트 산업·제품의 컨셉 등을 시각화하는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직종
디즈니 컨셉 아티스트? 디자이너의 생각을 그림으로 세상에 가시화하는 것이 주된 업무
디즈니에서 원하는 인재? 실력보다는 성격을 더 중점적으로 본다
디즈니에서 일했을 때 인상적인 부분? 디즈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들 행복하고 즐기면서 일한다

 

디즈니랜드 컨셉 아티스트 류현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류현지 컨셉 아티스트는 지난 2014년 LA에 있는 USC 영화학교를 졸업한 이후 Walt Disney Imagineering이 주최하는 Imaginations라는 대회에서 결승전에 출전하게 되는 영광을 누린 바 있다.

2023년 6월 UCLA에서 영화미술 석사과정을 마친 이후 그는 현재 LA 소재 월트 디즈니 이매지니어링에서 컨셉 아티스트로 일을 하고 있다. 류현지 컨셉 아티스트와의 인터뷰를 통해 디즈니 컨셉 아티스트로서 일하게 된 과정, 소감, 방식, 기억에 남았던 프로젝트, 가치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다음은 류현지 디즈니 컨셉 아티스트 인터뷰 내용이다.

디즈니 컨셉 아티스트 류현지

Q.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우선,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누구입니까?

안녕하십니까? 저는 현재 LA 소재 월트 디즈니 이매지니어링이라는 회사에서 컨셉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는 류현지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살다가 2018년에 USC 영화학교에서 학사과정을 마친 뒤, 올해 6월에 UCLA에서 영화미술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Q. 디즈니 컨셉 아티스트라는 직업이 생소한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디즈니 컨셉 아티스트는 무엇을 주로 하고 있습니까?

컨셉 아티스트는 주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나 제품의 컨셉 등을 시각화하는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직종입니다. 주로 컨셉 아트를 제작하거나 특정 디자인 프로젝트가 있을 때 참여하여 이를 시각화하는 일, 또는 요청자가 의뢰한 스토리를 시각적으로 풀어나가는 일을 하는 일 등을 주로 진행합니다. 

특히 제가 일하고 있는 디즈니의 컨셉 아티스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테마파크의 디자인을 도맡아 하는 세계적인 대기업이다 보니 컨셉 아티스트 하나의 단어로 묶을 수 있을 만큼 획일화된 작업을 하기 보다 많은 직책들과 업무로 세분화되어 있습니다. 

디즈니랜드 Haunted Mansion 프로젝트

여러 세분화된 R&R 중에서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분야는 현재 디즈니랜드에서 진행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들의 컨셉을 시각화하는 분야입니다.

특히 프로젝트 디자이너들이 계획한 컨셉과 세트 디자이너 분들이 제작해 주신 CAD 도면을 받아서 그 컨셉을 한눈에 볼 수 있게 그려내는 작업을 맡았습니다. 

제가 그려낸 컨셉아트는 회사 내부에서 사용되거나 이번 사례처럼 공식망을 통해 세상에 공개되기도 합니다.

Q. 제가 알기로 UCLA에서 영화미술 석사를 졸업한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 디즈니 컨셉 아티스트로 일을 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과정들을 거쳤는지 궁금합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지만, 돌이켜보면 거창한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니라 사실 조금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제가 걸어온 길을 조금 요약해 보자면, 어렸을 때부터 목표가 “영화미술팀의 일원이 되어 배경을 채우고 싶다”였습니다.

이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영화를 먼저 공부하고자 하였고, 당시 영화학교로서 업계 내 1, 2위를 다투던 USC 영화학교에 입학했습니다. USC 영화학교라고 하면 생소하실 텐데, 이 학교를 졸업하신 황동혁 감독님께서 ‘오징어 게임’을 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제가 목표로 하던 ‘영화미술’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영화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지만, 영화 미술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이에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에, 영화미술을 조금 더 자세히 가르치는 UCLA로 진학하기로 결심했고, 장학생으로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USC의 영화에 관한 기본기와 UCLA의 영화미술 경험을 더할 수 있었던 값진 과정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반을 통해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냈었고, 제 그림을 봐주신 디즈니랜드 관계자께서 스카우트 제의를 해 주셨습니다. 

Q. 디즈니에서 컨셉 아티스트로 일하는 게 어떤지 궁금합니다. 주로 어떤 일들을 하고 일하는 방식과 작업 방식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컨셉 아티스트로서 디자이너의 생각을 그림으로 세상에 가시화하는 것이 컨셉 아티스트의 주된 업무입니다. 아주 디테일한 사항까지 지시를 하는 것 같은 다른 여타 대기업들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디즈니는 아티스트들의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편입니다.

컨셉과 CAD 작업물을 보고, 이를 그림으로 구현해 나가면서, 어느 정도 진척이 됐을 때 컨셉 아트 디렉터나 미술감독분들께 검토를 받습니다. 

이때 그분들께서 한 줄 혹은 두 줄 정도의 짤막한 피드백을 주시면, 그에 맞춰서 수정하고 일부분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업무가 진행됩니다.

이 작업을 최종 허가를 받을 때까지 반복하는 형태로 일을 합니다. 수정사항 대로 수정하는 것이 표현을 저해할 것 같지만, 이 수정사항이 아티스트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면서까지 요구되지 않는 편인 것 같습니다. 일반 회사에서 보고서를 수정하는 듯이 컨셉 아티스트의 일도 다 똑같아 보여서 실망하시겠지만 저는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그 과정에 굉장히 흥미를 느낍니다. 

Haunted mansion 공개

Q. 가장 기억에 남았던 프로젝트는 뭐였는지도 궁금합니다.

제가 이번에 처음 맡게 된 Haunted Mansion이라는 놀이 기구의 대기 줄 확장 프로젝트가 아마 평생 기억에 남을 작업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Haunted Mansion은 캘리포니아에 처음 와서 지금까지 디즈니랜드에 가면서 늘 봐왔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 기구이며, 월트 디즈니가 살아생전 제작에 관여했던 몇 되지 않는 놀이 기구이기도 합니다. 

이런 놀이 기구에 관계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두근거렸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제 컨셉 디자인 디렉터셨던 킴 얼바인 (Kim Irvine) 님과 작업하면서 제가 정말 아티스트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례로, 저는 색을 배치할 때 세상에 있는 색으로 하기보다 그 느낌을 구현하기 위해 이색적으로 색 배치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보통의 회사 같으면 이렇게 색을 배치했을 때 당장 수정사항 코멘트에 리스트업 되겠지만, 디렉터님께서 과거에 컬러 스타일리스트셨던 이력이 있으시다 보니 나무에 보라색을 섞었는데도 오히려 칭찬하시면서 저의 색 감각을 놀라워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늘 제가 구현한 그림을 검토 받을 때마다 진심으로 즐거웠습니다. 

Q. 사실 그 과정이 쉽지 만을 않았을 것 같은데 힘들어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미국에 처음 왔던 20살, 이제 막 그림을 처음 그리기 시작했을 때 제가 상상하던 것과 제 실력이 비슷한 또래의 같은 꿈을 꾸는 친구들의 것과 너무나도 차이가 커서 실망하기도 많이 하고 마음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이런 좌절되는 순간에도 단지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금방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다시 펜을 잡을 수 있었어요. 언제나 느끼고, 지금도 느끼는 부분인데, 그림을 그리다 보면 10시간 동안 앉아서 그려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하는 저를 발견하곤 합니다.

그 집중한 작품의 결과가 항상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 과정이 즐겁다 보니 “아, 이런 기분이 일상이 되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하는 마음을 연로 삼아서 컨셉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 노력해 온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 잔잔한 즐거움 덕분에 여전히 그림이 어려워도 버티며 노력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허브 라이먼 그림

Q. 디즈니 컨셉 아티스트가 되려면 어떤 공부를 해야 되며 무엇을 준비해야 됩니까?

보통은 칼아츠 (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 나 아트센터 (ArtCenter College of Design)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이나 엔터테인먼트 디자인을 공부하는 편이 일반적인 과정인데, 저는 그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제가 걸어온 길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저는 수채화 공부를 했던 게 가장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수채화를 하다 보면 한눈에 보아도 잘 그린 것 같은 입시 미술에 눈이 갈 때도 있는데, 전통적인 수채화에 더 집중하며 공부했습니다. 

전통적인 수채화의 경우 우리나라 입시에서 지향하는 수채화와 다르게 물 조절이 중요한 포인트로 작용합니다. 따라서 물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다 보면 내가 사용하려는 색의 강약 조절을 할 수 있게 되고, 강약 조절을 하다 보면 색깔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배울 수 있게 되는 연쇄반응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패드 제품들로 인해 전통적인 수채화보다는 디지털 아트가 각광을 받고 태블릿 등으로 그림 그리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 됐지만, 무작정 컴퓨터로 그림 그리는 것보다 유화, 과슈나 수채화 같은 방식으로 기초를 쌓는 게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혼자 공부하는 방식도 물론 좋지만, 목표가 확실히 있는 편이 또 좋은 것 같습니다. 제 경우에는 우상으로 하는 작가인 호아킨 소로야 (Joaquin Sorolla) 와 유명한 디즈니 아티스트인 허브 라이만 (Herb Ryman)의 그림을 항상 바라보고 또 그들의 그림을 연구했었습니다. 

소로야 그림

Q. 어떤 가치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시는지 궁금합니다.

제 영화 미술에 대한 철학과 일맥상통하기도 하는데, 저는 진정한 여백의 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가지고 그림을 그립니다. 여백의 미는 주인공, 즉 그 배경과 환경 속에 사는 인물이 만들어내는 어떠한 공간인데 그건 빈 공간이라기 보다 그 들이 서 있는 맥락에 가깝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그 인물이 그려내는 “여백”을 어떻게 하면 더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채워 나갈까 항상 고민하면서 그림을 그립니다. 쉽게 말해 주된 포커스가 되는 주제부를 둘러싸는 다른 요소들은 채워져야 한다는 것이 제 철학 같습니다. 

Q.  포토폴리오 웹사이트에 있는 그림들을 보니까 그림들이 다 너무 퀄리티가 높고 감명 깊게 봤습니다. 처음에 어떻게 그림을 그리게 되셨고 디즈니 컨셉 아티스트라는 꿈을 가지게 되셨습니까?

제 그림에 대해 좋은 평가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꼭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았지만, 예전 그 당시에는 미술감독이 되려면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라하에서 그린 수채화 그림

저와 같은 꿈을 가진 친구들이 실제로 정말 그림을 잘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또 미술감독이 되기 위해서 해야 하는 필수 요소라고 생각했던 그림을 잘 그리려는 이유로 남들과는 조금 늦게 수채화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처음엔 시작하는 시기가 늦었다며 자책하면서 남들을 따라가기 위한 단순 공부로서 시작한 수채화 공부였지만, 점차 그림을 그리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하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간들이 저에게 주는 행복감을 직업으로 이어가기 위해서 그림을 직업으로 삼고 싶은 욕심이 서서히 생겼습니다. 이런 이유로 컨셉 아티스트의 길을 꿈꾸게 되었고, 디즈니랜드 컨셉 아티스트로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Q. 본인이 그린 작품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작품은 무엇입니까?

그림마다 다 스토리가 있고 이들을 그릴 때 들었던 생각 때문에 쉽게 정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꼽자면 제 석사과정 졸업 작품인 ‘천일야화’ 시리즈에 등장하는 상점가를 그린 그림입니다.

작품 천일야화 상점가

제가 의도한 대로 잘 구현된 노을이지만 그림을 봤을 때 정확히 몇 시 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신비로움과 따뜻함이 그림 속에서 묻어 나오도록 구현이 잘 된 그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그림이 평생 동안 기억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면 큰일 나겠지만, 현재로서는 그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드는 것 같습니다. 

Q. 디즈니에서는 어떤 인재들을 주로 채용하는 것 같습니까?

채용 기준을 제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실력보다는 성격을 좀 더 중점적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그예로, 제가 대학교 때 디즈니에서 주최하던 Imaginations이라는 테마파크 디자인 공모전에 결승 진출까지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저를 돌이켜보면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여유가 없고 불안하고, 늘 초조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들이 겉으로 묻어 나왔는지 당시에는 디즈니에서 채용 제안을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어린 마음에 얼마나 뛰어난 실력을 가져야 디즈니랑 일할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도 났습니다.

그때와 다르게 여유를 찾게 되고, 컨셉 아티스트로서 제안을 받아 디즈니에서 함께 일해 보니 당시에 제가 채용 제안을 못 받았던 이유는 ‘디즈니에서 중요한 것이 실력보다 인성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디즈니의 모든 오피스에서 일해 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저희 오피스에 있는 분들은 모두 붙임성이 굉장히 좋고, 서글서글하고, 모르는 게 있으면 서로 도와주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 놀이터에서 처음 본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놀 듯, 같이 일하는 상대방이 누가 되었건 관계 형성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채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Q. 디즈니에서 일할 때 어떤 부분이 인상적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디즈니는 전 세계 어린이들이라면 다 아는 대기업입니다. 그런데, 디즈니에서 일하면서 받은 느낌은 디즈니가 분명 대기업인데 사람들은 대기업 사람 같지 않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프라하에서 그린 수채화 그림

한국 드라마에서 보이는 대기업 이미지나, 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을 보더라도 다들 딱딱하고 퇴근 이후의 삶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디즈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들 굉장히 행복하게 사는 느낌이고, 업무 장소 그 자체를 즐기는 게 처음 갔던 제 눈에도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맡은 프로젝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인 것처럼 서로에게 피드백을 주고 아이디어를 주는 문화가 굉장히 잘 형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영화계에서만 하나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협업이 진행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음을 디즈니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Q. 반면 어떤 어려움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 어려움들을 어떻게 이겨내셨습니까?

사실, 석사 시절 부모님께 학비 및 생활비 부담을 드리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 것도 어려움이었지만, 무엇보다 그림을 그리면서 더 많은 그림을 보게 되고 연구하면 할수록 제 그림에 대한 확신이 없어지는 느낌이 가장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습니다.

특히 저는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고 다른 미술을 한다는 사람보다 늦게 미술을 접했다 보니 다른 이들의 포트폴리오를 보면 한없이 주눅 들고 제가 그린 그림에서 부족한 부분만 보이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림을 안 그릴 수는 없었습니다. 

작품 천일야화 궁전

아무리 부족하고 못해 보이는 그림을 그려도 그림을 그릴 때는 재밌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재미로 그려 나가는 그림에서 연습이 이어지고, 과거에 그렸던 그림과 비교했을 때 훨씬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기억나는 예로, 이번에 프라하 연극 박람회 때문에 찾아갔던 프라하에서 밖에 앉아 그림을 많이 그렸었습니다. 

프라하의 햇살을 받으면서 그리는 그림 속 빛의 변화를 잡아내는 저의 모습을 보면서 아, 조금이지만 그래도 실력이 늘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위로 삼아 그림을 그려야겠다며 다짐을 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들 즈음에 디즈니에서 제안이 왔습니다.

Q. 컨셉 아티스트라는 직업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이가 시각화하고 싶어 하는 생각을 나의 그림으로 구현해 내고, 진행되려는 프로젝트의 무드를 제 손에 의해서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인 부분 같습니다.

밖에서 보여지는 컨셉 아티스트의 모습은 디렉터들의 오른팔 느낌으로 주체가 되질 못하고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는 기술자의 모습이지만, 컨셉 아티스트로서 제가 그려내는 그림을 통해 해당 컨셉에 담겨야 할 여러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제 그림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디렉터가 발견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그런 사건이 이 직업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매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작품 바튼 핑크 카페

Q. 다른 컨셉 아티스트와는 차별화되는 본인만의 무기는 무엇입니까?

디즈니 플러스에 있는 ‘완다비젼’ 유명한 미국 드라마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의 프로덕션 디자이너이시자 제 석사 과정 교수님이신 마크 워딩턴(Mark Worthington)께서 항상 강조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진정한 디자이너가 되려면 감독부터 되어야 한다.’ 교수님께는 너무 죄송하지만 처음에는 그 말이 와닿지 않고, 저에게 미술이 아닌 감독의 길을 권유하는 것 같아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당시 저는 감독할 자질이 없다고 생각했고, 나는 영화 미술 및 디자인 공부를 하려고 왔는데 왜 이야기를 각색하고 풀어나가는 직업을 가지라고 하시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지금 일하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 철학이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감독된 입장에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고 싶은지, 감독이라면 더 나아가 이 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면 이 인물이 사는 세계가 어떻게 구축해야 와닿을지를 고민할 수 있는 사고와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컨셉아티스트가 된 지금도 아직 완벽한 감독이자 디자이너라 생각이 들진 않지만, 가르침을 받는 동안 그 교수님께 감독된 입장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인물이 사는 세계를 구축할까 하는 고민을 항상 하는 법을 배우면서 체득해 나갔었습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철학이 제 무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Q. 향후 꿈과 비전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예전에는 무조건 승진해서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습니다. 하지만 디즈니의 컨셉 아티스트로 활동하면서 미술감독님께 피드백을 받으며 얘기를 들어보니,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되면 그림 그릴 시간은 없고 계속 미팅밖에 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림을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이제 그 꿈보다는 다른 꿈을 꾸고 싶습니다. 저는 앞으로 영화와 테마파크를 오가면서 장르를 가리지 않고 화면 속 세상도, 실제 세상 속 컨셉도 구현하는 컨셉 아티스트로 쭉 살아가고 싶습니다. 

제가 가장 닮고 싶은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던 Herb Ryman이라는 아티스트가 디즈니랜드 아티스트셨는데, 인상파의 특징을 가지면서도 디테일이 다 살아 있어 양극을 다 잡는 그림을 그리던 분이셨습니다. 저는 그분을 보면서 그림을 잘 그려야겠다면서 다짐했었는데, 저도 궁극적으로 허브 라이먼 같은 모든 컨셉을 한데 아우를 수 있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습니다.

최종적인 꿈이라고 한다면 먼 미래의 저 같은 사람이 제 그림을 보면서 “아, 나도 저렇게 그리고 싶다” 하면서 제 그림을 모작하고 따라 하고 싶은 우상이 되는 게 최종적인 꿈이 아닐까 싶습니다. 

Q. 인터뷰를 읽고 계신 독자분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이 있다면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어릴 때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대학교에 와서야 주변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미술을 시작했습니다. 늦은 만큼 그림에만 매진했냐고 하면, 생활비를 위해서 과외도 하고 이런저런 알바도 해야 했기 때문에, 온전히 그림만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있었던 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바쁘다면 바쁜 일 상 속에서 시간 날 때마다 그림을 연습하고 배워 나갔어요. 다른 업계 사람들이 봤을 때 상당히 늦은 시기에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지만, 그림이 좋았고 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컨셉 아티스트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 이야기가 길었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첫 번째 메세지는,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이어 나갈 끈기만 있다면 뭐든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은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 누구나, 어느 조언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말같이 들리실 겁니다. 제가 정말로 드리고 싶은 메시지는 두 번째입니다. 어떤 분야에 있건, 스토리텔링 능력을 기르는 걸 소홀히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점입니다.

저는 영화를 하고 싶어서 LA로 왔고, 지금도 영화계에 있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영화를 정말 많이 보고 그냥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제가 본 영화에 대해 공부를 한 것이 아티스트로서 가장 큰 강점이 된 것 같습니다. 

영화에 대한 꿈을 안고 세계 최고의 영화학교에 와보니까 저보다 영화를 많이 보고 분석해 본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었고 그중에는 영화를 찍어본 사람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영화를 찍어본 적도 없고,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영화도 겉핥기 식으로 봤다 보니까 제가 차별화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택한 방법은 장르와 연도를 가리지 않고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이었습니다. 과장 안 하고 살면서 한 3000편은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고 분석한 영화들이 쌓이면서 이 감독이 영화를 찍으면서 무슨 말을 얼마나 명확하고 간결하게 하는지 보는 눈이 생기면서, 제가 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면 어떤 방향으로 전달하면 좋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저는 영화를 통해 이 스토리텔링, 즉 생각을 전달하는 능력을 길렀지만 책이든, 전공이 되었든, 어떤 분야가 되었든 공부하면서 차별화된 관점을 통해 스토리텔링을 하시는 법을 배우면 원하는 바에 한층 더 가까워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의 꿈도, 저의 꿈도 응원합니다! 

글/이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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