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타르코프스키의 유작 _희생_이 30년 만에 한국에서 재개봉한다는 소식이 영화계에서 화제
흔히들 볼 수 있는 멜로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투의 대사가 있다.
"너를 위해서 ~~까지 할 수 있어."
저 물결에는 그 어떤 극한도 허용된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이것의 표면적 의미는 당연하게도 그만큼이나 상대를 사랑함이지만, 이면에는 너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작용한다.
자세히 말하면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으니 너는 나를 떠나면 안 돼'와 같은 의도다.
위의 예시를 통해 그 대상이 무엇이든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필연적으로 두려움이 동반됨을 말하고 싶다.
특히 타르코프스키는 이에 더더욱 동의할 것이다.
그의 영화 속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시간의 영향 아래 있기에 영원할 수 없고, 이는 사랑을 비롯한 감정에도 해당한다.
그렇기에 그것이 소멸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려고 기도하고, 유랑한다.
즉, 긍정을 전제로 어느 존재의 내외에서 연결고리를 맺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 그 관계가 단절되기에 부정성을 내포한다.
특히 사랑은 내재한 감정 중 가장 깊은 곳에 있기에 그 정도가 다른 존재들을 상회한다.
사랑은 생명의 내면을 나약하게 만들고, 그에 따라 그들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사랑은 무엇이든 가능하게 만드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기도 한다.
인간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해답을 찾아낸 역사 또한 사랑에 가장 큰 동기가 있다.
에로스적인 사랑이든, 파토스적인 사랑이든, 플라토닉한 사랑이든, 혹은 생명이나 동족 간의 경계를 허문 사랑이든.
사랑은 일단 어느 범위를 넘어서면 공존하는 두려움을 아득히 초월하는 용기를 지니도록 한다.
<희생>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이것을 가장 보편적인 사랑의 형태인 가족을 향한 사랑으로 예사한다.
더 정확히는 아들인 고센을 향한 알렉산더의 사랑이다.
알렉산더 본인은 정신병에 허덕일뿐더러, 아내와 딸 마르타는 자신보다 오히려 그의 친구인 빅터에 의지한다.
타르코프스키는 항상 집이라는 재앙 혹은 어둠 속에서 문틈 사이로 발산하는 단 하나의 빛을 배치하면서 희망의 여지를 남긴다.
본작에서는 그것이 고센이고, 오로지 아들을 위해 세계 멸망의 압도적인 공포감을 극복할 용기를 고양한다.
그 빛은 합리로 점철된 그의 집이 연소하는 이미지로 치환되고, 위로 상승하는 연기의 아지랑이는 마지막 숏에서 고센이 위를 쳐다보니 나타나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관객의 마음에는 자리할 썩은 나무에 맺힌 꽃과 열매로 이어진다.
타르코프스키가 말하는 희망은 필모그래피가 진행될수록 내면의 숭고함이라는 속성을 거룩한 발산으로 묘사된다.
특히 <희생>이 보여주는 희망의 이미지는 강렬함과 동시에 그 불꽃을 표층에 그치지 않고 우리 마음 깊숙이 전달하여 인간 이성과 무관한 사랑의 힘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약 30년 전 한국에 처음 등장한 본작이 왜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타르코프스키의 작품 세계를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아마 ‘기적’일 것이다.
기적의 형태는 매우 일상적인 형태로 우리의 아주 가까이에 자리하지만, 우매한 인간은 소멸과 상실, 공허라는 부정적인 개념에만 얽혀 등잔 밑의 기적을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점점 멀어진다.
그의 영화 주요 플롯에 모험과 방황이 수반된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기적을 찾기 위해 떠나는 움직임과 거기서 파생되는 육체적, 정신적 고행은 허무하게 보일 결말부 기적의 실현을 외려 더욱 숭고하게 보이도록 한다.
여기서 타르코프스키는 근, 현대 인간의 필수 덕목인 합리에 대해 회의적인 질문을 던진다.
합리와 이성으로 대표되는 로고스로는 절대 우주를 전부 채울 수 없고, 그것이 비합리적이고 타당해 보이지 않더라도 응당 자기 몸을 내던지게 하는 파토스가 기적을 실현한다고 말한다.
이성에 의하면 가까이 있는 기적을 찾지 못한 채 배회하는 영혼은 어리석지만,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흥의 일렁임은 그것을 초월하고야 만다.
쉽게 말하면 계산적인 태도 대신 무지해도 상관없으니, 자신이 진정 원한다면 몸과 정신을 내던져야 한다.
그것이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말이다.
이제 영화를 벗어나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시선을 돌려 보자.
사각의 모더니즘이 대변하는 현대 사회는 시간이 갈수록 파토스적인 가치를 배제하고 수치화된 기록으로만 개개인을 판단하기에 이른다.
이성으로 모든 사회를 규명하려 하는 세태 속에서 <희생>은 내면에 불타오르는 감정의 정수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해 준다.
1995년 국내 첫 개봉 당시 수입 및 배급을 맡은 영화사 백두대간의 전 기획실장 손주연 각본가는 서울 관객 11만의 기록에 대해 기적 또는 행운이라고 회상한다.
극장에서 이 걸작을 다시 경험할 수 있다는 소식은 손 각본가의 말대로 그 자체로 기적이고, 이 영화는 현대인들에게 선물이 될 것이다.
글/이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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