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글레이저의 약 10년 만의 복귀작은 홀로코스트라는 상징적인 개념에 완전히 새로운 감각을 불어 넣는다.
조나단 글레이저의 뮤직비디오를 포함한 모든 작품을 돌아보면 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는 인상을 다른 관점에서 묘사하여 새로운 감각을 끌어내려는 예술적 지향점을 가진 듯하다.
라디오헤드의 <Karma Police>에서는 “악의”와 “시선”이라는 키워드를 시청자의 시선과 결부하여 마치 내가 세상을 삐뚤어진 태도로 바라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가장 유명한 <Virtual Insanity>는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노랫말을 전형적인 현대의 배경과 그렇지 못한 제이 케이의 몸짓으로 연결하여 인간과 모더니즘 사이의 간극을 독특하게 표현한다.
영화 <언더 더 스킨>에서도 “낯선”이라는 형용사에 대한 통념을 아예 비틀어 인간을 이방인의 시점에서 제시하고, 관객이라는 인간이 스크린 속 인간에게 기시감이 들도록 만든다.
신작 <존 오브 인터레스트> 역시 그러한데, 미디어에서 너무나 많이 인용된 홀로코스트라는 소재에서 연상되는 인상을 완전히 배제한다.
<쉰들러 리스트>나 <인생은 아름다워>, 혹은 <피아니스트>(2002)를 보면서 우리는 그 시대의 참혹함에 충격을 받고, 나치의 악행에 분노하며, 그 속에서 희생당하면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유대인과 주변인을 보며 휴머니즘을 내면에 머금는다.
본작은 상술한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이야기의 배경부터 그러한데, 주인공은 피해자가 아닌 무려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장을 지낸 실존 인물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다.
그렇다고 그의 악행을 낱낱이 파헤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최대한 은폐한 채 그와 그의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를 전면에 내세워 그들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관조하기만 한다.
카메라는 절대 그들 얼굴을 가까이서 비추지 않으면서 관객의 몰입을 막는다.
홀로코스트의 가해자를 평범한 인간 군상으로 비추는 극적 방법론은 이전에도 <하얀 리본>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시도되어 왔다.
허나 본작이 더욱 고평가를 받는 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의 참혹함을 평화로우면서 압도적인 시각적 이미지의 이면에 가둔 채 사운드로만 전달하려는 시도에 그 이유가 있다.
극예술의 기본인 서사의 전개는 전혀 눈에 띄지 않으며 그것에 커다란 전환이 발생하지도 않는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날카롭다 못해 눈을 벨 것만 같은 강렬한 이미지에, 거리감을 유지하다가 문득 관객을 덮치는 공포스러운 사운드의 조화로만 그들의 ‘역겨움’을 전달하고자 한다.
때때로 일상의 소리를 뚫고 나오는 압도적인 음향 효과는 우리가 망각했던 참혹함을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에서 느끼지 못했던 공포로 치환하여 잊지 못할 감각을 선사한다.
영화를 빙자한 현대예술과 같은 시도다.
평화와 공포, 전혀 다른 두 감정을 표방하는 감각들이 합쳐지니 묘한 어색함이 느껴진다.
영화의 궁극적 의미 또한 표현하고자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경계에 본질이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언급했던 평화와 공포, 루돌프의 자택과 수용소 사이의 벽, 쨍한 채도가 묘사하는 무채색과 채색, 밤이 되면 보이는 검정과 흰 이미지, 그리고 엔딩의 과거와 현재까지.
무엇 하나와 그것의 대척점에 서 있는 개념의 가운데를 보여주려 한다.
그 방법으로 화면의 전면에 등장하는 피사체보다 이면에 숨겨진 그것이 부각되어 보이게 만든다.
우리는 평화로운 루돌프 일가의 일상을 바라보지만, 저 너머에 들리는 고통스러운 희생자들의 비명을 신경 쓰게 된다.
그리고 낮에는 피사체보다 그림자가, 밤에는 어둠보다 빛에 집중한다.
관객은 보이는 것보다 경계 너머의 비가시적인 무언가의 실체를 알고 싶어 한다.
경계의 이미지는 엔딩에서 시간이라는 속성과 함께 더욱 확장된다.
어둠 속에서 미래라는 빛에서 발산되는 참상의 흔적을 확인한 루돌프는 갑자기 구토를 하기 시작한다.
마치 <액트 오브 킬링>을 오마주한 듯한 그의 행동은 선형적으로는 가려져 있던 양심이 장기에서 역류하여 속을 게워 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내 구토를 멈추고 가던 길을 가는 마지막 모습은 업보를 확인하고도 나치에 잠식당하여 최후의 양심까지 외면하는, 악인으로 완벽히 변모한 소시민의 초상이다.
다만 올해 3월 진행된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 수상 당시 조나단 글레이저의 발언은 결말의 방향성이 반대로 해석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다.
홀로코스트 영화는 당연히 피해자인 유대인의 편에 서고, 글레이저 본인도 유대인이다.
그런데 수상소감에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언급하며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태도를 취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면 미래, 즉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현재의 어느 부분을 조명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홀로코스트 박물관은 그 당시의 아픔을 기리고 기억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지만, 그것을 보란 듯이 전시하고 영리를 취하는 행태는 진심으로 그들을 추모하는지에 대한 의심이 들기도 한다.
카메라는 박물관 전시를 준비하는 직원들을 루돌프를 대하는 태도와 유사하게 마치 악을 마주한 것처럼 차갑게 응시한다.
그 시선의 주체인 루돌프는 하마터면 양심에 찔릴 뻔했지만, 피해자들이 구축한 미래를 통해 “내가 하는 일이 옳구나”라고 안심하며 속 편히 계단을 내려간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장면에서 이토록 다른 정서를 끌어내는 마력이 대단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성이 상술한 결말부를 제외하면 거의 고정되어 있다.
루돌프 일가는 악인이니 그를 둘러싼 세계를 완벽히 조성하고 이면의 비극을 비가시적으로 표현해야겠다는 감독의 의도가 꽤 쉽게 인지된다.
보다 풍부한 정서로 바라볼 여지가 부족하여 예술적 인상이 처음 관람했을 때와 비교하면 크게 달라지지 않고, 그 깊이가 풍부해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2020년대를 대표하는 걸작이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본작이 주목하는 것은 예술적 감흥이 아닌 새로운 감각적 자극이다.
그것이 감독의 영화적 지향점이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대중들은 더 이상 홀로코스트를 마주했을 때 참혹함과 휴머니즘만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압도적인 공포감을 마주할 수도 있다.
이 감각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도 해당한다.
우리는 이미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SNS로 대변되는 사회의 이면에 얼마나 더러운 이면이 자리하고 있는 지 안다.
길을 걷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공포스러운 사운드를 문득 상기한다면 일상을 채우는 소리에 의해 겁에 질릴 수도 있다.
선과 악의 경계에 서서 존재하는 인간들은 루돌프처럼 악에 잠식당할지, 혹은 그럼에도 자신만의 선을 찾아 나서야 할지 주체적으로 생각해야 할 때이다.
글/이성현 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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